〈나 무엇과도 주님을〉이라는 찬양을 묵상하다 보면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는 건강과 가족의 평안, 필요한 공급과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한 걸음 더 깊은 자리로 초대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에서
“하나님 자신이 내게 얼마나 귀한 분인가?”로.
시편 73편의 아삽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시편 73편 — 악인의 형통 앞에서 흔들린 아삽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며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신보다 악인이 더 평안하고 풍족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질문은 결국 시편 73:13의 고백에까지 이릅니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우리의 질문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했는데 왜 달라지지 않습니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데 제게는 없습니까?”
신앙이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받게 될 결과를 계산하는 자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편 73:17 — 하나님의 성소에서 시작된 전환
시편 73:17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עַד־אָבוֹא אֶל־מִקְדְּשֵׁי־אֵל אָבִינָה לְאַחֲרִיתָם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עַד(ʿad) — “~할 때까지”
עַד의 기본 의미는 ‘~까지, ~할 때까지’입니다.
단어 자체가 영적 전환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의 구조에서는 아삽의 혼란과 깨달음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아삽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מִקְדְּשֵׁי־אֵל — 하나님의 성소
מִקְדְּשֵׁי־אֵל(miqdĕšê-ʾēl)은 형태상 복수형 표현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의 여러 영역 또는 성전 경내를 가리키는 것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과도하게 신학화하기보다 **‘하나님의 성소’**라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삽이 같은 현실을 하나님의 성소에서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אָבִינָה(ʾāḇînâ) — 이해하고 분별하다
אָבִינָה는 히브리어 בין(bîn)에서 나온 말로 ‘이해하다, 분별하다, 깨닫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 자체가 신비한 영적 계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편의 문맥에서는 16절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삽이 성소에 들어간 뒤 현실을 다르게 분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אַחֲרִית — 현재의 형통에서 삶의 결국로
17절 마지막에는 **אַחֲרִית(ʾaḥărît)**가 등장합니다.
‘마지막, 결국, 종말’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삽은 지금까지 악인의 현재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서 그의 시간축이 달라집니다.
현재의 형통 → 삶의 결국
눈앞에 보이는 한 장면만으로 인생 전체를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아삽의 변화는 악인의 종말을 깨닫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 73:23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아삽은 이제 악인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보다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붙들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붙들고 계셨음을 발견합니다.

시편 73:25 하파츠(חָפַץ) —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 마음
시편 73:25에서 아삽은 고백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사모하다’에 사용된 표현은 **חָפַצְתִּי(ḥāp̄aṣtî)**입니다.
기본형 חָפַץ(ḥāp̄aṣ)는 문맥에 따라 원하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바라다라는 의미 영역을 가집니다.
이 단어 자체를 언제나 ‘자발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73편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아삽의 갈망이 어디로 이동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왜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습니까?”
라고 묻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 외에 내가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라고 고백합니다.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성소에 들어간 후 아삽의 환경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그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시간축: 현재의 형통 → 삶의 결국
비교 기준: 악인과 나 → 하나님과 나
갈망의 대상: 그들이 가진 것 → 하나님 자신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시선이 바뀌자 갈망의 대상도 바뀌었습니다.
חֵלֶק —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
시편 73:26에서 아삽은 하나님을 자신의 영원한 분깃이라고 고백합니다.
‘분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חֵלֶק(ḥēleq)**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 자신의 몫이라는 의미입니다.
처음의 아삽은 다른 사람이 가진 몫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발견합니다.
“나의 몫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더 좋은 것을 받아 만족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시편 73:28에는 다음 표현이 등장합니다.
קִרֲבַת אֱלֹהִים לִי־טוֹב
(qirăḇaṯ ʾĕlōhîm lî-ṭôḇ)
우리말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라고 번역합니다.
טוֹב(ṭôḇ)는 ‘좋다, 좋은 것’을 뜻합니다.
처음의 아삽은 악인이 누리는 형통을 좋은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발견한 ‘좋음’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에서 바뀐 것은 단순히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복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바뀐 것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과 시편 73편
이제 찬양의 고백이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건강도 필요하고, 도움도 필요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초대합니다.
은혜보다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응답보다 응답하시는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리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관계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빌립보서 3:8 — 그리스도를 아는 것의 탁월한 가치
바울 역시 비슷한 가치의 전환을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3:8의 핵심 표현 가운데 하나는
τὸ ὑπερέχον τῆς γνώσ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입니다.
ὑπερέχον(hyperechon)은 ‘능가하는, 뛰어난’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γνῶσις(gnōsis)는 ‘앎, 지식’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핵심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것이 가치 없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들을 능가하는 가치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의 탁월한 가치입니다.
아삽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가장 원하는 분이 되었고,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5:15 — 주님이면서 친구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본문에는 **δοῦλος(doulos, 종)**과 **φίλος(philos, 친구)**가 대비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권이 사라졌거나 예수님과 제자가 동등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명령만 수행하는 관계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들은 것을 알려주시며 그분의 뜻을 알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관계로 초대하십니다.
경외하면서도 가까이 가고,
순종하면서도 마음을 나누며,
주님의 마음을 알고 함께 걷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나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을 원하는가?
기도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환경이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아삽도 처음부터 그렇게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흔들렸고, 질문했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지나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주님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더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바라보며 제게 없는 것을 세어보기도 했고, 기도한 만큼 응답받고 싶었습니다.
주님, 제 시선을 다시 돌려주세요.
눈앞의 형편만으로 주님의 선하심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기보다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해주세요.
은혜보다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응답보다 응답하시는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주세요.
제 육체와 마음이 쇠약할 때에도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환경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는 날에도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고백하게 해주세요.
주님, 제가 원하는 가장 큰 선물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의 찬양 — 나 무엇과도 주님을
오늘 묵상을 마치며 〈나 무엇과도 주님을〉을 천천히 들어보세요.
무엇을 더 구하기보다 잠시 주님 자신을 바라보며 아삽의 고백을 나의 기도로 드려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 시편 73:28
※ 이 아래에 YouTube 동영상 블록을 삽입하세요.
자주 묻는 질문 FAQ
시편 73편에서 아삽의 마음이 바뀐 결정적인 지점은 어디인가요?
시편 73:17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가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아삽은 성소에 들어간 뒤 악인의 현재 모습만 보던 시선에서 그들의 결국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시편 73:25의 하파츠(חָפַץ)는 무슨 뜻인가요?
חָפַץ(ḥāp̄aṣ)는 문맥에 따라 원하다,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바라다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시편 73편에서는 아삽의 갈망이 악인의 소유에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옮겨가는 문맥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는 무슨 의미인가요?
시편 73편 초반에서 아삽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했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을 자신의 ‘좋음’으로 고백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아삽이 무엇을 복으로 여기는지가 변화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는 잘못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구하도록 가르칩니다. 시편 73편이 보여주는 더 깊은 질문은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입니다.
🎵 오늘의 찬양 — 〈나 무엇과도 주님을〉
오늘 묵상을 마치며
〈나 무엇과도 주님을〉 찬양을 천천히 들어보세요.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서 시선을 돌이켜
마침내 하나님 자신을 가장 귀한 분으로 고백했던 것처럼,
잠시 내가 구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것인가’보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를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 시편 73:28
찬양을 들으며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보다
주님 자신을 더 사랑하게 해주세요.
▶ 〈나 무엇과도 주님을〉 찬양 듣기
[골방라이브] 김상진 – 아바 아버지 ( Abba My Father)

답글 남기기